그리고 그 무한 반복의 순환을 통해 탑에 바쳐지는 비원의 행진이 바로 '탑돌이'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적 의미를 넘어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정성'의 집적이라 할 만하다. 탑은 '공과 정성을 들여' 쌓은 구조물 우리 말글에서 탑은 '쌓는' 구조물이다. '세우다'는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짓거나[造塔]' '쌓는다'. 그것은 '정성'과 동일한 쓰임새를 갖는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와 같은 속담에서 드러나듯 탑은 '공과 정성을 들여' 쌓는 구조물이다. 이 땅의 겨레들은 골짜기와 재를 넘으며 지천인 돌멩이 하나 둘 던져서 서낭당의 돌무더기 [누석단 (累石壇)]을 만들듯 작든 크든 돌을 보기만 하면 차곡차곡 쌓기 시작한다. 지방의 한적한 절집을 돌면서 만나게 되는 손바닥만 한 소박한 돌탑은 바로 그러한 무명 불자들의 정성이 만들어 낸 구조물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옛 탑이 1500여 기이고, 국보와 보물의 약 25%가 탑인 것도 탑을 향한 우리 겨레의 신앙과 서원이 얼마나 지극한 것인가를 반증해 준다. 인도의 탑은 주로 벽돌로 지은 전탑(塼塔)이었고 중국에도 전탑이 많았던 데 비해 일본에서는 목탑이, 우리나라에서는 석탑이 중심이다. 석탑의 재료가 되는 화강암 등 '좋은 돌'이 많아서라고 한다.
안동 지역에는 유달리 전탑이 많다. 그것도 버젓한 절집의 금당 앞에 자리 잡은 게 아니라, 절집을 잃고 저 혼자 외로이 서 있다. 원래 절집과 함께 있었으나, 절이 허물어지고 탑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 남은 탑 이름은 대체로 '○○사터 ○층○탑'의 형식을 갖지만, 안동의 전탑들은 여전히 동네 이름 뒤에 붙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절터가 발견되지 않거나, 추정은 되지만, 고증이 되지 않은 까닭이다. 신세동(법흥동) 7층 전탑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는 법흥사(法興寺)에 속한 전탑으로 추정된다. 조선조 폐불정책에 따라 폐사가 된 법흥사터에는 고성 이씨 탑동종택이 들어서 있는데, 안동 역사서인 <영가지(永嘉誌)>에 따르면, 유실된 상륜부의 금동장식은 임청각을 창건한 이명의 아들이 철거해 그것을 녹여 객사에 사용하는 집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누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이 집안의 선조는 문화적으로 '실수'를 한 셈이다. 더 큰 실수, 아니 '몹쓸 짓'을 한 건 일제다. 탑과 지척에 중앙선 철길이 놓여 있으니 이는 대를 이어 걸출한 독립지사를 배출한 임청각 고성 이씨 집안의 내력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마당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놓아 집안의 기를 끊고자 한 여파다. 덕분에 이천 년을 지켜온 벽돌탑은 철둑에 막힌 강을 간신히 굽어보며 밤낮으로 발치를 오가는 철마의 쇳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그게 탑의 보존에 얼마만 한 영향을 끼치는가는 물어보나마나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국보 중에서 이 탑만큼 시달림과 수모와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없다. 절은 양반이 빼앗아 갔고, 강변의 빼어난 경치는 철둑과 안동댐이 막아 버렸는데 곱게 쌓은 기단부는 20세기 인간들이 시멘트를 거의 맹목적으로 처발라 볼썽사납기 그지없게 되었다."
유홍준의 답사기에서 어느 할머니의 질문("언제부터 예 이런 굴뚝이 있었니껴?")과 함께 소개된 '동부동 5층 전탑'은 보물 56호로 안동역 소화물 관리소 바로 아래에 있다. 안동역에 내려 역광장에서 왼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바로 이 유서 깊은 통일신라시대의 탑을 만날 수 있다. 유료 주차장을 지나면 나타나는 탑 주변은 담장과 수목들로 조경이 잘 이루어져 있으나 간선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자연 일반인들의 발길을 뜸한 곳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안동에서 9년째 살고 있는 내가 이 탑을 제대로 바라보게 된 건 지난해 10월이다. 탑 부근에 당간지주가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곳이 <동국여지승람>과 <영가지> 등에 기록된 법림사(法林寺) 터로 추정되고 있다. 유홍준은 그의 답사기에서 이 탑의 아름다움을 "1층부터 5층까지 급격히 체감하여 날카로운 상승감을 유도하고 있"는 데서 찾고 있다. <영가지>에는 법림사 전탑이 7층이며, 조선시대에 크게 보수를 하였다. 상륜부는 법흥사탑과 같이 금동제였으나 1598년에 명나라 군인들이 도둑질해갔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지금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림사 터에는 안동역사가 들어서 있으니, 안동의 전탑들은 쇠말[鐵馬]과의 인연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보물 제57호 '조탑리 5층 전탑'은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빠져나오면 만나게 되는 첫 동네, 조탑리의 밭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다. 유홍준의 답사기에는 사과밭 가운데 있다고 씌어 있지만, 지금 그 과수원은 밭이 되었다. 더 볼 것 없이 농민들의 삶을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는 개방농정의 결과일 터이다. 과수원일 때보다 빈 밭 가운데 서 있는 고탑은 쓸쓸해 보인다.
인왕상은 암좌 위에 서 있으며 주먹코에 왕방울 눈, 불끈 쥔 주먹, 솟아오른 다리 근육 등 힘이 넘친다. 그러나 그것은 유홍준이 지적한 대로 "무섭지도 위엄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귀엽기 짝이 없"는 것이다. 상륜부 전체가 없어졌고, 탑의 높이는 8.65m이다. 안동의 다른 전탑과는 달리 옥개 낙수면에 기와가 없으나 원래는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옥동 3층 석탑 통일신라시대의 돌탑으로 높이는 5.79m. 안동시 평화동 영명학교 입구에 있다. 탑 부근은 민가가 밀집되어 절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절 이름 또한 알 길이 없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옥신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다. 보물 제114호. '옥동(玉洞)'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당시 이곳이 옥동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에 있는, 흔히 볼 수 없는 돌탑이다. 작은 집채 모양의 계단식 돌탑은 정사각형 평면 위에 층마다 비교적 크고 반듯한 판돌 넉 장으로 면을 이루게 한 뒤, 그 안을 막돌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돌탑은 고려나 조선시대 전기에 쌓은 것으로 추측되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한반도 중남부에서 가장 온전한 상태를 보전하고 있는 계단식 피라미드로 보고 있다. 즉 사람의 무덤[총(塚)])이라는 것이다. 정연한 규칙에 따라 탑을 쌓은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민간신앙(성황당 누석단)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알려졌다. 탑 아래쪽에는 석탑사(石塔寺)가 이 돌탑을 지키고 있다. 지역에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먼 옛날 200리 떨어진 영주 부석사의 스님들이 이곳을 찾은 뒤 이 탑이 생겼다 한다. 매일 자신들의 공양 밥 일부를 훔쳐간 범인이 신통수를 부리는 학가산의 능인(能仁) 대사(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방문해 유명해진 천등산 봉정사를 창건한 분이다)라는 것을 안 스님들이 그를 죽이려고 돌을 들고 떼 지어 찾아왔다. 그러나 오히려 능인 대사가 설법으로 꾸짖자 금세 깨닫고 속죄의 표시로 가지고 온 돌을 모아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안동에는 두 기의 모전석탑(대사리 모전석탑, 하리 모전 3층석탑)을 비롯해 열다섯 기의 석탑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특이한 것은 이들 중 절집 마당에 있는 것은 봉정사 3층 석탑이 유일하다는 것이다.
출처 : 안 동 러 브 글쓴이 : 舞鶴峰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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