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 이야기

[스크랩] 목숨은 한 숨 사이/정무스님

그래나야 2008. 12. 1. 14:15
***목숨은 한 숨 사이***
    ...정 무 스님... 모든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늙어감에 따라 쇠약해집니다. 허리는 굽고, 곱던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검버섯이 피며, 머리카락은 하얗게 세어집니다. 또 오장육부로 찾아드는 병을 견디고 호소하다가 결국 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이를 실감하지 못합니다. 옆에서 빤히 보면서도 자기 자신도 분명 늙고 병들어 마침내 죽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망각한 채 재물을 모으고, 쾌락과 맛있는 것을 찾고, 특별한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 보다 윗자리에 서고자 지나치게 집착하고 애를 씁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부(富)의 축적과 명예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세속적인 삶의 모습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재물과 명예를 얻는 것을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하도록 세뇌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되비추어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세상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진시황은 불로장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50년도 채 살지 못하였고, 빌게이츠같은 세계 제일의 부자라도 죽을 때는 그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며, 최상의 권력자인 미국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때가 되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하물며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는 보통 사람들이겠습니까? 이것이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제행무상입니다. 이 무상함 속에서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 우리는 후회와 슬픔과 근심이 가득한 가운데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가 아니라, 부처님처럼 생사(生死)를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실로 우리의 목숨은 무상한 것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며칠 사이에 있습니다." "너는 아직 도(道)를 모른다." 부처님께서는 또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밥 먹는 사이에 있습니다." "너도 아직 도를 모른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숨 한 번 쉬는 사이에 있습니다." "그렇다. 너는 도(道)를 아는구나." -사십이장경-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어가지만, 어느 누구도 눈앞에서 일어나는 생사(生死)를 자기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가 우리 중생들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목숨은 숨 한 번 사이에 달려있습니다. 천 년 만 년 살 것 같은 우리의 생명도 따지고 보면 찰나 지간에 불과합니다. 비록 백년을 산다 할지라도, 밥먹고 잠자고 놀러 다니고 잡담하는 등의 의미 없는 시간을 제하고 나면 얼마나 남습니까? 그리고 그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또한 우리는 무의미하게 낭비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은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깨우치신 것과도 같이 숨 쉬는 사이에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숨 쉬는 그 짧은 찰나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인생에서 참된 삶을 살 수 있고, 마침내는 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가에서는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노력하여 업을 벗어라"고 합니다. 이 또한 한쪽 귀로 흘려버리면 별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실로 다급하기 짝이 없는 절실한 충고입니다. 사람인 우리로서는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별다른 느낌이 없겠지만, 만약 미물들이 사고(思考)를 한다고 가정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사람을 보게 될 때,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분명 '불가사의한 해탈경계'로 보일것입니다. 미물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부처님을 바라보는 것과 조금도 덜하지 않는 엄청난 불가사의가 바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마음의 흐름이 있습니다. 이 마음의 흐름이 조화로울 때 나타나는 감정의 미묘한 화음은 우리를 한 없이 너그럽고 편안하게 합니다. 반대로 성이 나서 격동하는 마음 상태가 될 때는 얼마나 공격적이고 파괴적인지 모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음의 작용이 나와 남을 포근하게 감싸 기도 하지만, 업을 짓고 스스로를 괴롭게 만드는 요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금, 사람의 몸을 받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고 해탈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악업을 지어 지옥중생이나 아귀가 될수도 있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처님이나 수많은 조사님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사람 몸 받았을 때....'를 당부하셨습니다. 그 당부의 말씀은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향하여 '젊었을 때 잘하라'고 당부하는 것과 대동소이합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게 마련입니다. 깨달아 업을 벗고 부처를 이루는 것은 '사람 몸을 받은' 바로 이 시기의 중대사입니다. 축생이 도를 이루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죽어서 천상에 나는 경우는 있어도 도를 이루는 경우는 없습니다. 천인들도 하늘의 복락이 다하면 그만일 뿐, 그 천상에서 해탈의 기회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지금 사람의 몸을 받고 있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사람인 것이 당연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느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의 소중함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모이고 모여야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이 가능한지를 진실로 안다면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곧 부처' 라고 그토록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이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 자신을 그저 그렇다고 여기는 것은 부처님을 그저 그렇다고 여기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인연이 있어 '나'가 있게 되었지만, 그 있음은 오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그 나쁜 업의 고리를 끊지 않는다면 우리는 고해의 바다에서 영원히 윤회할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기회가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냉엄한 진리의 세계입니다. 부처님조차 어찌할 수 없는 업의 불가사의 입니다. 자기의 업은 오직 스스로가 다스려야 합니다. 부모형제도, 부처나 조사도 돕지를 못합니다. 오직 할 수 있는 것은 충고요 지도일 뿐, 선택과 변화는 '나'의 몫입니다. 사람의 몸 받았을 때! 지금이 기회입니다. 도를 닦기 가장 좋은 사람의 몸을 받았을 때, 우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님의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번뇌 이전의 근본 마음자리, 본 고향의 소식을 알아야 합니다. -월간 [법공양]에서-
Living In The Country/조지윈스턴
출처 : 德의 동산
글쓴이 : 은빛물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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